수많은 여행자, 순례자들과 화려한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을 걷다 보면, 종종 이 도시가 품고 있는 시간의 깊이에 놀라곤 한다. 화려한 르네상스 건축물 사이로 기가막힌 고대의 보물들이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산 마르코 광장 건너편에 있는 '베네치아 국립 고고학 박물관(Museo Archeologico Nazionale di Venezia)'에서 우연히, 그러나 운명처럼 마주친 놀라운 돌판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기원전 2세기에 만들어진 '에우불로스의 비석(Stele di Euboulos)'이다.
그리스 델로스 섬에 있던 이 거대한 비석이 어떻게 바다를 건너 베네치아까지 오게 되었을까?
이 비석에 숨겨진 두 가지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를 짚어본다.
🔍 포인트 1. 첫 줄에 숨겨진 2,000년 전의 타임스탬프
돌판 맨 위쪽에 굵게 새겨진 헬라어 대문자들을 자세히 보자. ΕΠΙ ΑΡΙΣΤΑΙΧΜΟΥ ΑΡΧΟΝΤΟΣ (에피 아리스타이크모우 아르콘토스) 이는 "아리스타이크모스가 아테네의 최고 집정관(아르콘)으로 있던 해에"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연도를 표기할 때, 그 해 최고 권력자 이름을 썼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는 무려 기원전 159~158년경이다. 2천 년도 훌쩍 넘은 아득한 과거의 시간이 돌판 위에 선명한 도장처럼 찍혀 있는 셈이다.
🔍 포인트 2. 하단에 새겨진 9개의 동그라미는 무엇일까?
비문의 내용은 델로스 섬에 거주하던 시민들이 '마라톤 출신의 에우불로스'라는 인물에게 바치는 일종의 거대한 '감사패'다. 그가 종교 사절단으로서 뛰어난 외교적 활약을 펼친 것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비석 하단에 조각된 9개의 둥근 무늬들이다.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월계수, 아이비, 올리브 등으로 엮은 이 화환들은 에우불로스가 공직을 훌륭히 수행할 때마다 시민들로부터 받은 '9번의 표창(명예의 관)'을 뜻한다. 가슴에 주렁주렁 훈장을 단 현대의 장군들처럼, 고대 그리스인들도 이렇게 돌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훈장을 새겨 그 명예를 뽐냈던 것이다.
🌊 그리스의 보물이 베네치아 한복판에 있는 이유
그렇다면 그리스에 있어야 할 이 돌판이 왜 베네치아에 있을까? 16세기, 지중해 무역을 주름잡던 베네치아의 유력한 귀족 '조반니 그리마니(Giovanni Grimani)'가 이 비석을 수집하여 자신의 저택 뜰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당시 베네치아는 단순한 상업 도시를 넘어, 동지중해 전역의 고대 문화와 예술품들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이자 문화의 중심지였다. 이 비석 하나만 보아도 당시 베네치아 귀족들이 고대 그리스 문명에 얼마나 깊은 동경을 품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수집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엿볼 수 있다.
화려한 물의 도시 베네치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렇게 지중해의 2천 년 역사를 끌어안은 묵직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베네치아 여행에서 화려한 곤돌라도 좋지만, 조용한 고고학 박물관에 들러 2천 년 전 고대인이 받은 9개의 훈장을 직접 찾아보는 건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