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케로Cicero는 로마 여성의 지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선조들께서는 현명하게도 모든 여성을 후견인의 통제 아래 둬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여성은 선천적으로 나약하기 때문이다.”
로마제국 시대 여성 교육과 결혼
여성의 ‘후견인’은 물론 남자였다. 처음에는 아버지, 결혼하면 남편이 후견인 노릇을 했다. 그러나 아버지나 남편이 둘 다 일찍 죽었을 때는, 그들 또는 정부 관리의 뜻에 따라 다른 남성 친척이 이를 대신 맡기도 했다. 공화정 시대에 그러한 후견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여섯 명의 베스타 여사제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후로, 아버지와 남편을 여의거나 세 자녀를 낳은 자유민 여성은 후견인의 보호를 받지 않아도 되었다. (해방 노예 여성의 경우는 네 명을 낳아야 했다.)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와 똑같은 수준의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비슷한 교육은 받았다. 그러나 기초교육 이후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귀족 가문의 여식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들은 귀족 집안의 청년처럼 수사학이나 법률 같은 학문을 하는 게 아니라, 멋진 옷을 차려입고 헬라스나 라틴 문학을 배우고 리라와 같은 악기 연주법이나 가무를 익히는 정도였다.
결혼은 대개 중매로 이루어졌다. 예비 신랑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지참금 액수가 달라졌다. 조혼(早婚)은 로마의 풍습이었다. 신부는 성장하여 혼인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약혼하여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린다는 것은 여자아이에게 있어 무척 따분한 생활일 것이다. 남자와 시시덕거리는 여자로 보이거나 심지어 다른 남자와 가까이하는 것조차 약혼에 대한 불경으로 비춰질 수 있었다.
<알도 브란디니 결혼식>, 로마시대 벽화, 기원전 1세기, 바티칸 박물관 소장
그러나 일단 결혼하면, 여성에게도 상당한 자유가 주어졌다. 여성을 거의 집에 가두다시피 하던 그리스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지만, 초기 로마 사람들은 여성에 대한 엄한 통제를 법으로 정해놓았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가족과 사회생활을 편하게 영위하길 원한 덕분에 그리스보다 여성에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하였다.
로마의 여성은 남편의 동반자며 조력자로 간주되었다. 잔치나 연회에서 아내는 남편의 옆에 앉았는데, 그리스에서는 그것이 추문 거리가 되었다. 또한 자녀와 노예, 집안일 전반에 대해 권리를 공유했다. 많은 집안에서 노예는 여성이 감독했다. 아무도 로마의 여성에게 집에만 있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여성들은 자유로이 손님을 맞고 외출도 하며 이웃집에 가거나 장을 보러 가기도 했다.
하지만 역할에선 남녀 간에 큰 차이를 두었다. 공화정 시대 초기에 여성은 포도주를 마실 수 없었고, 대신 포도 주스를 마셨다. 후에 이 규제는 완화되었다. 또 로마의 여성은 저녁 연회 때 남편처럼 비스듬히 기대어 누울 수가 없었고 똑바로 앉아 있어야만 했다. 술 마시는 모임에 참석해서도 안 되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오피우스 법
그런데도 고대 세계에서 비교적 가장 자유로웠던 것이 로마의 여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도 했는데, 그 한 예로 로마법의 역사에서 입법과 관련하여 매우 큰 논쟁거리였던 “오피우스 법”이라는 것이 있다. 기원전 216년 칸나이(Cannae)에서 로마군이 한니발에게 참패한 이후에 제출된 이 법안은 여성의 사치품 소비를 제한한 것이다.
호민관 마르쿠스 푼다니우스(Marcus Fundanius)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Lucius Valerius)는 ‘오피우스 법’의 폐지를 민회에 제안하였다. 오피우스 법은 포이니 전쟁이 한창이던 퀸투스 파비우스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시대에 호민관 가이우스 오피우스가 입안한 법안으로, 여성은 1/2 온스(약 14g) 이상의 금을 소유할 수 없고, 알록달록한 색으로 염색한 옷을 입지 못하며, 성스러운 날을 제외하고는 마을이나 도성 안에서 혹은 1마일 이하의 거리를 갈 때 마차에 타는 것도 금지했다. 호민관 마르쿠스(Marcus)와 푸블리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Publius Junius Brutus)는 이 법을 존치하는데 찬성하여, 오피우스 법 철회 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겠노라고 공언했다. 귀족 계급의 많은 대표가 각기 찬성과 반대 견해를 피력하여 로마가 시끄러웠다.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찬반 투표자들로 붐볐다. 여성의 미덕인 정숙함도 남편의 만류도 무시한 채 로마의 여성들은 집을 뛰쳐나왔다. 그들은 거리와 공회당 입구를 막고, 태평성대에 남성들의 부(富)는 늘어나는데 여성들의 부는 억압한다며, 이전의 부를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변 마을과 외곽에서 온 여성들까지 가세하여 항의하는 여성들의 수는 날마다 늘어났다. 그들은 집정관이나 법무관 혹은 다른 정무관들을 길에서 불러 세워 따질 정도로 대담했다.
원로원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때 大-카토는 오피우스 법의 철회 움직임에 대해 반대 연설을 했다. 다음날 더 많은 여성이 거리로 나왔다. 여성들은 오피우스 법 철회 안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한 두 호민관의 집 입구를 막았다. 여성들은 호민관들이 거부권을 거둘 때까지 물러나지 않을 태세였다. 결국 법정은 철회안으로 의견이 모아졌고, 오피우스 법은 통과된 지 20년 만에 정식으로 폐지되었다.
제한된 세계에서 대부분의 노동을 노예가 했기에 자유민 여성들이 할 일은 별로 없었다. 로마에 여성 의사, 여비서, 여교사, 여성 미용사, 여성 재단사, 여성 비단상인 혹은 여성 시장 상인이 있었다지만, 이들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했다. 하지만 여성 검투사도 있었다. 시인 마르티알리스는 이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대영 박물관에는 경기장에서 싸우는 여성을 묘사한 부조를 소장하고 있다. 이 부조로 미루어보건대, 여성 검투사는 투구를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시칠리아 엔나(Enna), 아르메리나 광장(Piazza Armerina) 유적지에서 발견된 모자이크는 비키니를 입고 여러 가지 운동을 하는 여성 선수들과 우승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https://it.m.wikipedia.org/wiki/File:Villa_Romana_Del_Casale_Bikini_All_Girls.jpg
가장 흔했던 호박 장신구는 하류층 여성들만 썼다. 높은 계급의 여성들은 금이나 다른 귀금속을 썼다.
Louis Gauffier, 로마 여성의 관대함(La générosité des femmes romaines)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