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의 보석 같은 도시, 아레쪼(Arezzo)에는 조용하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성당이 있다. 바로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Basilica di San Francesco) 내, 바치 경당(Cappella Bacci)이다. 중앙제단 뒤쪽에 있는 이 경당의 벽을 가득 채운 프레스코화는 르네상스 시대 위대한 수학자며 화가였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가 그렸다. 주제는 "참 십자가 이야기(Leggenda della Vera Croce)"다. 단순히 성경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기원부터 발견까지, 전해오는 모든 전설을 하나의 서사로 풀어냈다.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 내부 전체, 아레쪼
1. 아담의 죽음에서 싹튼 구원의 씨앗
이 거대한 서사는 13세기 제노바의 대주교였던 야코부스 데 바라지네(Jacopo da Varagine)가 신자들의 신앙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그때까지 전해오던 성인들 이야기를 집대성한 <황금전설(Legenda Aurea)>을 바탕으로 한다.
이야기는 인류의 조상, 아담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아담이 죽음을 앞두고, 그의 아들 셋(Seth)을 에덴동산으로 보내 '자비의 기름'을 얻어오라고 했다. 대천사 가브리엘은 기름 대신 '생명의 나무 씨앗' 세 알을 주면서 아담의 입에 넣어서 묻으라고 했다. 아담의 입안에 심어진 씨앗은 그의 시신 위에서 거대한 나무로 자라났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아담의 죽음과 묻힘" in Cappella Bacci
2.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의 예언
수천년의 세월이 흘러 솔로몬 왕 시절, 예루살렘 성전 건설에 쓰기 위해 나무를 뱄다. 이상하게 길이를 맞추면 짧아지고, 늘리면 길어져서 도저히 목재로 쓸 수가 없어 내버려졌다. 결국 다리(교량)로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하기 위해 이 다리를 건너게 되었고, 여왕은 신비한 예지력으로 "이 나무가 장차 온 세상의 구원자를 매달게 될 것"임을 알아보고 그 앞에 무릎을 꿇어 경배했다. 그리고 솔로몬에게 "이 나무에 매달릴 분으로 인해 유대인의 왕국은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겁이 난 솔로몬은 나무를 땅에 묻어 버렸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시바 여왕의 경배와 솔로몬 왕 방문" in Cappella Bacci
3. 발견의 서막, 콘스탄티누스의 꿈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땅 속에 묻었던 나무가 드러나 십자가 형틀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 십자가의 행방은 다시 묘연해졌다.
더 시간이 흘러, 로마 제국의 운명이 걸린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날 밤으로 이야기는 이어진다. 잠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꿈속에 천사가 나타나 빛나는 십자가를 보여주며 속삭인다. "In hoc signo vinces(이 표시로 승리하리라)."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이 장면을 기막힌 명암 대비로 묘사했다. 어둠 속에서 텐트를 비추는 천상의 빛은 마치 현대 영화의 한 장면과 같다. 다음 날, 십자가 문양을 깃발로 내건 콘스탄티누스는 대승을 거두고, 이듬해인 313년에 제국 내에서 모든 종교 관용령 "밀라노 칙령"을 공표한다. 아담의 무덤에서 자란 나무가 로마 제국의 정신적 기둥이 된 셈이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콘스탄티누스의 꿈" in Cappella Bacci
3. 성녀 헬레나의 추적과 증명
콘스탄티누스의 모친, 성녀 헬레나는 아들이 황제 시절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찾았다. 그런데 발견된 것은 한 개가 아니라 세 개의 십자가였다. 어떤 것이 예수님의 것인지 몰라 난감해 하던 차에, 마침 장례행렬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한 청년의 장례식이었다. 헬레나는 시신을 멈춰 세우고, 그 위에 십자가를 하나씩 얹어 보았다. 한 십자가를 올렸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청년이 되살아난 것이다. 이렇게 참 십자가를 증명하여 로마로 가져왔다.
코라도 자킨토, "참 십자가 증명 이야기" in Basilica Santa Croce in Gerusalemme, Roma
이후 로마의 성녀가 살던 집터에는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대성당(Basilica Santa Croce in Gerusalemme)"(아래 사진)이 세워졌고, 참 십자가는 그곳에 보존되었다.
4.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시선
Piero della Francesca는 이 복잡한 이야기를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고 질서 있게 구성했다. 격정적인 감정보다는 빛과 구조, 균형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림 속 인물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지만, 그 깊은 고요함 속에서 오히려 더 깊은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적 신학의 특징이다.
감정이 아니라 이해와 성찰을 통해 하느님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참 십자가 이야기"(전체), in Cappella Bacci
5. 수난 주간에 이 작품을 본다는 것
수난 주간은 단순히 예수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시간이 아니다. 그 고통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되묻는 시간이다. ‘참 십자가 이야기’는 바로 그 질문에 응답한다.
십자가는 단순한 고통의 상징이 아니라, 시간을 관통하며 의미가 완성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그래서 이 프레스코를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결어
조만간 나는 다시 아레쪼의 이 작은 경당을 찾을 것이다. 그 안에서 십자가는 더 이상 과거의 사건이 아님을, 그것은 인간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구원으로 이어지는 긴 이야기임을 잊지 않고 싶다. 수난 주간에 컴퓨터 앞에서 이 그림을 마주하는 것보다, 그 이야기를 현실에서 살아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