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9일 화요일

[로마여행의 숨은 보석 2] 단 하나의 열쇠구멍으로 3개국을 훔쳐보다: 아벤티노 언덕과 오렌지 정원

 안녕하세요, 로마 현지에서 인사드리는 이탈리아 공인 가이드 세레나입니다.

매일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웅장한 콜로세움과 경건한 바티칸 광장을 걷다 보면, 문득 로마의 화려함 이면에 감춰진 고요한 사색의 공간이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가이드로서 숨 가쁜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혹은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고문헌 번역 작업에 지쳐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제가 습관처럼 발걸음을 옮기는 나만의 아지트 같은 곳이 있습니다. 바로 로마의 7대 언덕 중 가장 평화롭고 낭만적인 정취를 자랑하는 아벤티노 언덕(Colle Aventino)입니다.

이곳에는 로마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이 꼭 한 번쯤은 마주쳐야 할, 작지만 경이로운 두 가지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달콤한 향기가 머무는 '오렌지 정원'과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뷰를 품은 '몰타 기사단의 열쇠구멍'입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서민들의 거주지였지만, 제정 시대로 접어들며 귀족들의 호화로운 저택이 들어섰던 이 언덕은 오늘날 로마에서 가장 우아하고 고즈넉한 산책로가 되었습니다.


사벨로 공원, 그리고 성 도미니코의 오렌지 정원(Giardino degli Aranci)

아벤티노 언덕의 가파른 길을 천천히 오르다 보면, 짙은 녹음 사이로 로마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이 나타납니다. 이 공원의 공식 명칭은 '파르코 사벨로(Parco Savello)'이지만, 로마 현지인들에게는 '오렌지 정원(Giardino degli Aranci)'이라는 애칭으로 훨씬 더 친숙한 곳입니다. 13세기 로마의 유력한 가문이었던 사벨리 가문의 굳건한 요새가 있던 이 자리는, 1932년 건축가 라파엘레 데 비코(Raffaele de Vico)의 손길을 거쳐 대중을 위한 아름다운 공원으로 탈바꿈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단지 탁 트인 전망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정원의 담장 너머에는 로마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산타 사비나 대성당(Basilica di Santa Sabina)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며 무척 흥미롭게 다가왔던 전승 중 하나가 바로 이 성당과 오렌지 나무의 인연입니다. 1220년경 도미니코 성인이 스페인에서 직접 가져온 로마 최초의 오렌지 나무를 이곳 성당 정원에 심었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오렌지 정원에서 마주하는 나무들이 그 당시의 것은 아니겠지만, 봄이 되면 하얗게 피어나는 오렌지꽃의 달콤한 향기는 수백 년 전 수도사들이 거닐며 묵상했던 그 고요한 평화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듯합니다. 일몰 무렵 이곳 테라스에 서서 붉게 물들어가는 테베레 강과 멀리 영롱하게 빛나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둥근 지붕(쿠폴라)을 바라보는 순간은, 복잡했던 마음이 단숨에 정화되는 마법 같은 경험을 선사합니다. 로마의 수많은 전망대 중에서도 가장 낭만적이고 차분한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오렌지 정원입니다.


열쇠구멍 너머로 펼쳐지는 3개국의 마법 (Il Buco della Serratura)

오렌지 정원의 감동을 가슴에 품고 조금 더 길을 따라 올라가면 몰타 기사단 광장(Piazza dei Cavalieri di Malta)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곳에서는 아주 기이하고도 흥미로운 풍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막다른 길의 굳게 닫힌 거대한 녹색 철문 앞에, 국적을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다름 아닌 작은 '열쇠구멍' 하나를 들여다보기 위함입니다.

이 녹색 철문은 십자군 전쟁 당시 의료 봉사를 위해 창설되었던 구호기사단, 즉 '몰타 기사단(Cavalieri di Malta)' 소유의 빌라 정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자신의 차례가 되어 황동 장식의 작은 열쇠구멍에 한쪽 눈을 살며시 가져다 대면, 믿을 수 없는 경이로운 풍경이 시야에 쏟아져 들어옵니다.

어둠 속 좁은 시야 양옆으로는 정원의 정갈하게 다듬어진 나무들이 완벽한 원근법의 액자를 만들어내고, 그 자연의 액자 정중앙, 아득히 먼 끝점에는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전 쿠폴라가 거짓말처럼 선명하게 들어옵니다. 이 완벽한 시각적 장치는 1765년 이탈리아의 위대한 판화가이자 건축가인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Giovanni Battista Piranesi)가 정원을 재건하면서 의도적으로 설계한 천재적인 구도입니다.

이 작은 구멍 하나를 통해 우리는 3개의 주권 국가를 동시에 바라보는 엄청난 시각적 사치를 누리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이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탈리아(Italia), 문 너머로 보이는 치외법권 지역인 몰타 기사단국(Sovrano Militare Ordine di Malta)의 영토, 그리고 그 너머 아득한 종착점에 찬란하게 빛나는 바티칸 시국(Città del Vaticano)까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오직 영원의 도시 로마만이 품을 수 있는 압도적인 시공간의 중첩입니다. 영토는 없지만 주권 국가로 인정받는 몰타 기사단의 독특한 지위가 만들어낸 역사적 해프닝이기도 합니다.


좁은 시야를 통해 바라보는 위대한 진리

수십 년간 로마의 역사를 안내하는 가이드로서, 그리고 심오한 철학과 문학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가로서 텍스트와 씨름하다 보면 가끔 이 열쇠구멍이 우리 삶의 깊은 은유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은 구멍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 좁고 제한된 시야에 온전히 집중하고 들여다볼 때 비로소 가장 멀리 있는,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진리(성 베드로 대성전)를 똑똑히 목격할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수많은 정보를 얕게 흩뿌리기보다 단 한 줄의 묵직한 통찰을 전하고 싶어지는 요즘, 이 아벤티노 언덕의 열쇠구멍이 주는 메시지는 제게 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다음 이탈리아 로마 여행에서는 가이드북이 이끄는 바쁘고 획일화된 동선에서 잠시 한 걸음 물러나 보세요. 해 질 녘 가로수 그늘이 짙게 드리운 아벤티노 언덕을 천천히 오르며 오렌지 향기에 취해보고, 열쇠구멍 너머로 펼쳐지는 3개국의 기적 같은 풍경을 여러분의 눈동자에 직접 담아보시길 권합니다. 

현지 가이드가 가장 사랑하고 강력히 추천하는, 절대 후회하지 않을 로마의 진짜 보물이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로마 여행의 숨은 보석 4] 2천 년의 시간을 수직으로 관통하는 타임머신: 산 클레멘테 성당

 안녕하세요, 이탈리아 공인 가이드 세레나입니다. 콜로세움의 거대한 위용에 압도된 후 발길을 돌리는 수많은 여행자를 볼 때면, 저는 가끔 속으로 '진짜 로마는 저 땅속에 있는데!' 하며 아쉬움을 삼키곤 합니다. 로마라는 도시는 거대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