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탈리아 공인 가이드 세레나입니다.
로마의 심장이자 모든 여행의 출발점인 테르미니(Termini) 역. 매일 수백만 명의 여행자가 캐리어를 끌며 설렘과 함께 첫발을 내딛는 곳입니다. 역을 빠져나와 거대한 분수가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내는 레푸블리카 광장(Piazza della Repubblica) 쪽으로 걷다 보면, 광장 한편에 무너져 내리다 만 듯한 거칠고 허름한 붉은 벽돌 벽 하나를 마주하게 됩니다.
화려한 대리석 조각과 웅장한 파사드(정면성)를 기대했던 수많은 관광객은 이 볼품없고 투박한 외관에 실망한 채, 서둘러 콜로세움이나 스페인 광장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하지만 건축과 미술의 거대한 흐름을 이해하는 현지 가이드로서, 이 허름한 벽 앞에 잠시 멈춰 서라고 말합니다. 낡은 청동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상상하지 못했던 압도적인 로마 최고의 '대반전'이 숨을 멎게 할 것입니다.
오늘 소개할 숨겨진 보물은 고대 로마 제국의 가장 거대한 목욕탕에서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통해 거룩한 성전으로 부활한 곳, 바로 <천사들과 순교자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gli Angeli e dei Martiri)>입니다.
<사진: 김혜경 세레나> 대성당 정면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세워진 거대한 제국의 목욕장
이 허름한 외벽의 정체는 서기 306년, 로마 제국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세운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공중목욕탕인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Terme di Diocleziano)'의 잔해입니다. 무려 3,000여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던 이 거대한 건물은 단순한 목욕장이 아니라 도서관, 산책로, 체육관까지 갖춘 고대 로마인들의 완벽한 복합 문화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웅장함 이면에는 뼈아픈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극심하게 탄압했던 인물로, 이 거대한 목욕장을 건설하기 위해 무려 4만 명이 넘는 그리스도인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돌을 나르고 벽돌을 굽다 처참하게 순교했습니다. 이후 로마 제국이 쇠락하고 이민족의 침입으로 수로가 끊기면서, 이 거대한 목욕장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폐허로 방치된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갔습니다.
<사진: 김혜경 세레나> 대성당 내부, 천장은 로마시대 목욕장 천장.
노거장의 손끝에서 피어난 생명: 미켈란젤로의 공간적 통찰
시간이 흘러 1561년, 교황 비오 4세는 폐허가 된 목욕장 터에 천사들과 이곳에서 희생된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을 기리는 대성당을 짓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당대 최고의 천재이자 이미 86세의 노인이었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에게 맡깁니다.
보통의 건축가였다면 이교도의 잔재인 목욕탕의 벽을 모두 허물고 그 위에 새로운 양식의 성당을 화려하게 지어 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던, 신앙심 깊고 통찰력 넘쳤던 미켈란젤로는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합니다. 그는 수만 명의 순교자가 피 흘려 지은 이 고대의 공간 자체를 거룩한 유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목욕탕의 거대한 뼈대와 미지근한 물이 있던 방(테피다리움), 차가운 물이 있던 방(프리기다리움)의 구조를 고스란히 살려 대성당의 내부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십자가의 가로축을 비정상적으로 길게 배치한 그의 파격적인 설계 덕분에, 좁고 어두운 입구를 지나 성당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방문객들은 폭 90미터, 높이 30미터에 달하는 아찔하고 장엄한 공간감에 압도되고 맙니다. 무려 16미터 높이의 붉은 화강암 기둥 8개가 육중한 고대의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은 화려한 치장 없이도 인간을 압도하는 거대한 숭고미를 뿜어냅니다. 고대 로마인들의 뛰어난 건축 공학과 르네상스 천재의 영성이 완벽하게 교차하는 기적의 순간입니다.
<사진: 김혜경 세레나> 대성당의 현관에서 바라본 내부
시간과 빛이 새겨진 거대한 해시계, 클레멘타인 자오선
대성당이 품고 있는 또 다른 흥미로운 비밀은 성당 바닥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45미터 길이의 청동 선, 바로 '클레멘타인 자오선(Linea Clementina)'입니다. 1702년 교황 클레멘스 11세의 명으로 천문학자 프란체스코 비안키니가 설치한 이 선은 로마에서 가장 크고 정확한 해시계이자 달력입니다.
<사진 출처: 위키백과> Il disco solare proiettato sulla meridiana poco prima del mezzogiorno solare
맑은 날 정오가 되면 성당 천장에 뚫린 작은 구멍(오쿨루스)을 통해 들어온 한 줄기 태양 빛이 바닥의 자오선 위를 정확히 비춥니다. 이를 통해 부활절 날짜를 정확히 계산하고 춘분과 추분을 측정했던 것이죠. 종교가 과학을 배척했던 시대가 아니라, 신의 섭리를 가장 정확한 우주의 법칙으로 증명하고자 했던 가톨릭 신학의 이성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산입니다.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문헌을 번역하는 제게는, 18세기의 과학 발전과 종교가 아름답게 공존하는 이 바닥의 선 하나가 그 어떤 화려한 명화보다도 깊은 감동을 줍니다.
겉모습이 아닌, 본질을 들여다보는 로마 여행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대성당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일깨워 줍니다. 겉보기에 허름하고 무너진 붉은 벽돌일지라도, 그 문을 열고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설 용기만 있다면 수천 년의 역사와 천재의 숨결이 빚어낸 찬란한 공간을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박해받던 순교자들의 눈물이 밴 목욕탕이, 결국 그들을 위로하는 가장 웅장한 성전이 된 역사의 거대한 아이러니. 이것이 바로 로마가 우리에게 던지는 깊은 인문학적 성찰입니다.
<사진: 김혜경 세레나> 대성당의 내부에서 바라본 출입구쪽
테르미니 역에 도착하셨나요? 캐리어를 끌고 숙소로 가기 전, 가장 먼저 이 거친 붉은 벽돌 앞 청동 문을 힘껏 밀어보세요. 고대 제국의 위용과 르네상스의 영혼이 여러분을 거대하게 품어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