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14일 일요일

[이탈리아 역사·예술 산책] 로마의 시간 속에 멈춘 얼굴: 이고르 미토라이의 '세례자 요한의 머리'

 로마 떼르미니 역 근처, 

반원형의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는 공화국 광장(Piazza della Repubblica)을 보고 있는 허름하지만 만만하지 않은 성당이 하나 있습니다. 앞선 포스팅에서 언급한 ‘천사들과 순교자들의 성 마리아 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gli Angeli e dei Martiri)’입니다. 로마 시대 최대 규모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목욕탕' 폐허를 미켈란젤로가 성당으로 탈바꿈시킨 걸로 유명하죠.

[로마 여행의 숨은 보석 5] 붉은 벽돌 뒤에 숨겨진 제국의 웅장함: 미켈란젤로의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대성당 ☛ https://www.serenakhk.com/2026/06/5.html


하지만 오늘은 대성당이 된 이곳, 고대 로마의 공간 속에서, 우리를 묵묵히 응시하고 있는 한 '현대 조각'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세계적인 조각가 이고르 미토라이(Igor Mitoraj)의 작품, <세례자 요한의 머리(Testa di San Giovanni Battista)>입니다.


<사진: 김혜경 세레나>


🏛️ 부서진 조각으로 인간의 본질을 묻다: 조각가 이고르 미토라이

이고르 미토라이(Igor Mitoraj, 1944~2014)는 독일에서 태어난 폴란드 출신의 조각가로, 이탈리아의 대리석 산지로 유명한 피에트라산타(Pietrasanta)에 정착하여 자신의 예술 세계를 꽃피웠습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탁월했던 그는, 세계 곳곳의 유적지와 대광장에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며 '현대적 고전주의'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다 보면 폼페이 유적지나 피사의 사탑 근처, 혹은 피렌체 보볼리 정원 등에서 거대하지만 어딘가 '부서진' 얼굴 조각들을 마주친 적이 있을 텐데요. 모두 미토라이의 작품입니다! 그의 작품은 한결같이 완벽하지 않습니다. 팔다리가 잘려 있거나, 얼굴의 반쪽이 날아가 있거나, 텅 빈 눈동자를 하고 있습니다. 미토라이는 이 '파편화'를 통해 영원할 것 같던 고대 문명의 덧없음, 그리고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너무나도 연약한 우리 인간의 존재와 상처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완벽한 비례 속에 숨겨진 균열이야말로 그가 생각한 가장 진실된 인간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사진출처: 폼페이 공식 사이트> https://pompeiisites.org/mostre/mitoraj-pompei/



<사진출처> https://www.intoscana.it/it/igor-mitoraj-opere-toscana/


🕊️ 고요한 비극과 영혼의 안식: <세례자 요한의 머리>

성당 내부, 하늘에서 쏟아지는 채광창의 빛을 받으며 놓인 <세례자 요한의 머리> 앞에 서 봅니다. 헤로데 왕에 의해 참수당한 세례자 요한의 비극적인 성경 속 이야기는 수많은 예술가에 의해 피가 낭자하고 잔혹하게 묘사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미토라이의 요한은 다릅니다.

카라라의 대리석으로 만든 이 두상은 잔인함보다는 깊은 우수와 침묵을 머금고 있습니다. 그의 두 눈은 굳게 감겨 있고, 입술은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죠. 참수의 고통을 넘어선 초월적인 영혼의 평화가 느껴진다고 할까요? 요한이 겪은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내면의 상처와 부서짐을 은유적으로 보여줍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놓인 '공간'의 특성입니다. 고대 로마인들의 세속적인 쾌락이 가득했던 목욕탕 벽면,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던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피와 땀, 미켈란젤로의 숭고한 건축물, 그리고 20세기 조각가가 빚어낸 대리석의 두상. 이 수천 년의 시간이 쌓인 한 공간에서 모두 함께 숨을 쉬며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사진: 김혜경 세레나>

💡 세레나 가이드가 짚어주는 핵심 포인트 2가지!

1. 조각의 얼굴에 감겨 있는 '보이지 않는 붕대'를 찾아보세요! 미토라이의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입이나 이마 주변에 붕대가 감겨 있는 듯한 디테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갈망, 혹은 세상의 억압으로부터 입을 틀어막힌 인간의 고독을 상징하는 미토라이만의 강력한 시그니처이니 현장에서 꼭 눈으로 확인해 보세요.

2. 조각상 너머의 붉은 벽돌과 빛의 앙상블 이 조각은 밝고 모던한 갤러리가 아니라, 거칠고 투박한 고대 로마의 벽돌(오푸스 라테리치움)을 배경으로 놓여 있습니다. 성당의 높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이 시간에 따라 청동 두상의 굴곡에 어떻게 그림자를 드리우는지 잠시 멈추어 서서 보세요. 빛과 그림자가 교차할 때, 감겨 있던 요한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듯한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로마 여행 중에 잠시 들러, 수천 년의 시간을 견뎌낸 거대한 돌벽 사이에서, 상처 입은 채로 평온을 찾은 요한의 얼굴을 만나 보시길 권합니다. 여러분의 지친 마음에 깊은 위로를 건네줄지도 모르니까요. 여러분의 로마 산책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바라며, 또 다른 가슴 뛰는 이탈리아 이야기로 찾아올게요. 

차오(Ciao)!

[이탈리아 역사·예술 산책] 로마의 시간 속에 멈춘 얼굴: 이고르 미토라이의 '세례자 요한의 머리'

 로마 떼르미니 역 근처,  반원형의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는 공화국 광장(Piazza della Repubblica)을 보고 있는 허름하지만 만만하지 않은 성당이 하나 있습니다. 앞선 포스팅에서 언급한 ‘천사들과 순교자들의 성 마리아 대성당(Bas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