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박물관] 벼락 맞은 저주가 영원의 축복으로: 바티칸 원형의 전시실, '황금빛 헤라클레스 청동상'의 비밀
안녕하세요! 로마의 숨겨진 이야기를 우리말로 생생하게 전해드리는 이탈리아 공인 가이드 김박사입니다. 바티칸 박물관의 수많은 방 중에서도 판테온을 꼭 빼닮은 '원형의 전시실(Sala Rotonda)'. 이전 포스팅에서 이 방의 바닥을 장식한 경이로운 3세기 모자이크와 중앙의 13미터 붉은 반암 잔을 소개해 드렸는데요. 오늘은 시선을 벽감 속으로 한 번 돌려보려고 합니다.
거대한 대리석 조각상들이 벽감(Niche)을 묵직하게 채우고 있는 이 공간에서, 유독 이질적이면서 시선을 강하게 사로잡는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대리석의 숲에서 홀로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거인, 바로 '마스타이 리게티의 헤라클레스(Ercole Mastai Righetti)'라고도 불리는 헤라클레스 조각상입니다. 거대한 청동상에 도금한 이 작품은 어떤 기막힌 사연을 품고 여기까지 온 것일까요?
1. 1864년, 캄포 데 피오리 땅 속에서 마주한 폼페이우스 극장의 유산
이 조각상은 처음부터 바티칸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시계를 1864년으로 되돌려 보겠습니다. 로마 시내 한복판, 활기찬 시장이 열리는 '캄포 데 피오리(Campo de' Fiori)' 근처에 있는 피오 리게티 궁전(Palazzo Pio Righetti)의 안뜰에서 한창 굴착 공사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이 궁전이 서 있는 자리는 고대 로마 시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했던 장소로 유명한 거대한 '폼페이우스 극장'이 있던 곳입니다.
인부들이 땅을 파 내려가던 중, 거대한 트래버틴 대리석 판들로 지붕을 덮은 일종의 지하 벙커 같은 공간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무거운 돌판을 조심스럽게 치워낸 순간, 어둠 속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거대한 황금빛 청동상이 누워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려 1,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땅속에 잠들어 있던 서기 2세기경(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절로 추정)의 고대 로마의 금동 헤라클레스상이 완벽한 형태에 가깝게 세상의 빛을 다시 보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2. 대리석 판에 새겨진 세 글자 "F.C.S." - 벼락 맞은 신의 형상
고대의 청동상이, 그것도 이토록 거대한 크기로 온전하게 발견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고고학자들을 더욱 흥분시킨 것은 조각상을 덮고 있던 대리석 판에 새겨진 의미심장한 세 글자였습니다.
"F.C.S." 이것은 라틴어 'Fulgur Conditum Summanium(풀구르 콘디툼 숨마니움)'의 약자로, 해석하자면 "밤의 벼락을 맞아 이곳에 묻혔다"는 뜻입니다.
고대 로마의 종교적인 관습과 신학적 배경을 들여다보면 이 문구의 의미가 명확해집니다. 로마인들은 조각상이나 특정 장소가 벼락을 맞으면, 이를 신의 징벌 혹은 하늘의 불길한 계시라고 여겼습니다. 특히 낮에 치는 벼락은 주피터(유피테르) 신의 뜻으로, 밤에 치는 벼락은 주피터와 동격의 어둠의 신인 숨마누스(Summanus)의 분노로 보았습니다. 밤에 벼락을 맞은 이 헤라클레스 조각상은 그 즉시 '불길하고 부정한 것', 혹은 '신이 거두어 간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로마 사제들의 엄격한 종교법에 따라, 벼락 맞은 물건은 불경을 타지 않도록 벼락이 떨어진 바로 그 자리에 깊이 파묻고 봉인해야만 했습니다. 폼페이우스 극장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사람들의 숭배를 받던 이 황금빛 영웅은, 자연의 벼락 한 번에 철저히 저주받은 존재가 되어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생매장의 운명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3. 저주가 만들어낸 영원의 축복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는 바로 여기서 발생합니다. 땅속에 묻혔다는 이 '저주'가 역설적으로 이 조각상을 영원히 살려낸 '축복'이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중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고대 로마의 수많은 거대 청동상들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교도의 신상들은 쓸모없는 우상이었고,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절에 청동은 대포와 같은 무기 제조와 동전 주조에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로마를 장식했던 수천 개의 화려한 청동상들이 용광로 속에 던져져 쇳물로 녹아내렸습니다. 우리가 현재 박물관에서 보는 고대 로마 조각상의 99%가 대리석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헤라클레스는 로마인들의 종교적 두려움 때문에 이미 땅속 깊이 안전한 벙커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용광로의 위협도, 약탈자들의 시선도 닿지 않는 완벽한 타임캡슐 안에서 기나긴 중세의 혼란기를 무사히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밤하늘의 벼락이라는 재앙이, 결과적으로 이 걸작을 파괴로부터 지켜낸 가장 강력한 방패가 된 셈입니다. 발굴 직후 교황 비오 9세(Pio IX)는 곧바로 이 조각상을 바티칸으로 가져왔고, 오늘날 우리는 이 기적적인 생존자를 원형의 전시실에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4. 불멸의 영웅이 건네는 메시지
가까이 다가가 작품의 디테일을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청동상은 네메아의 사자를 맨손으로 때려잡고 그 가죽을 왼팔에 걸친 채, 오른손에는 듬직한 몽둥이(곤봉)를 쥐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도상학적(Iconography) 특징입니다. 그런데 왼손에 쥐고 있는 작은 물건에 주목해 보시길 바랍니다. 바로 '헤스페리데스의 황금 사과'입니다.
헤라클레스에게 주어진 12가지 불가능한 과업 중 11번째였던 이 황금 사과를 따오는 일은, 인간의 굴레를 벗고 '불멸(Immortality)'의 신성을 얻게 됨을 상징합니다. 신학적,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고대 로마인들에게 헤라클레스는 단순한 괴력의 사나이가 아니라, 끝없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신의 반열에 오른 '인간 승리의 표상'이었습니다. 조각상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고된 과업을 마친 영웅 특유의 지친 듯하면서도 평온한 표정이 묘한 감동을 줍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얼굴이 당시의 젊은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모습을 신격화하여 반영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사진출처: 바티칸박물관> https://www.museivaticani.va
바티칸 원형의 전시실 한가운데 서서 이 황금빛 조각상을 바라볼 때면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불멸을 상징하는 황금 사과를 손에 쥔 영웅. 벼락이라는 자연의 저주를 받고 땅속에 생매장되었으나, 결국 천년의 시간을 이겨내고 화려한 박물관의 중심에서 황금빛을 뿜어내는 기적의 예술품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바티칸 박물관을 찾게 되면, 파괴와 소멸의 역사를 견뎌내고 우리 앞에 선 이 굳건한 청동 거인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희망의 메시지를 들려주는지 잠시 마주해 보는 건 어떨까요.
